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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상식 사이

아돌프 히틀러, 그 비참한 최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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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또 한 번의 재앙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가장 먼저 희생을 치른 나라는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당시 군사 동맹 조약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지요.


1939년 9월 결국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그 때부터 히틀러의 독재적 야망이 커지기 시작했지요. 바로 직후에 국방장관 직을 겸임하면서 1940년 5월 프랑스까지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연합군 측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단합해있던 독일을 막을 수 있던 나라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요. 유럽의 정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심지어 프랑스마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1940년 말 중립국을 제외한 서부유럽과 북부유럽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독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우세한 공군력을 앞세워 영국을 공격했으나, 영국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며 영토를 더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마지막 희망인 영국을 끝끝내는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히틀러‘는 55~60세 사이로 점차 심신이 쇠약해져갑니다. 이때부터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히틀러‘는 무리한 전략과 겸직을 실행하면서 주변인들로부터 점차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마 전 유럽을 점령하던 이 시기에 무리하지 않고, 전쟁을 중단했더라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 유럽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히틀러’는 난데없이 소련을 공격하고 싶다고 발언합니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자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짙었긴 했지만, 전쟁 상황을 고려하면 누가보아도 무리수였습니다. 이제 전장은 두 곳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영국과 전쟁을 펼치던 동부전선과 소련을 치러가는 서부전선, 이 둘 사이에서 다시 히틀러는 판단착오를 일으킵니다. 소련을 치러 동부전선에 있는 병력을 거의 대부분 서부전선으로 배치시키죠.

당연히 당시 미국과 견줄만한 강대국이었던 소련과의 전쟁은 아무리 독일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과거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통해 몰락했다는 경험이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결국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고,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이때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합니다. 물론 그전의 인물인 ‘브라우히치’라는 사령관은 해임되었죠. 그런 후, 이번에는 미국에게까지 선전포고를 합니다.


맞습니다. ‘히틀러’는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죠. 결국 소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나폴레옹 때와 마찬가지로 살을 에는 추위에 독일병사들 역시 속수무책이었죠. 1924년 말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당했던 독일 병사들은 결국 처참하게 몰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분명히 후퇴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독일병력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로 ‘히틀러’의 명령 때문이었죠. 그가 후퇴를 금지 시키면서 22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계속해서 무리한 정책을 감행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노환문제가 있었고, 정신도 이미 오락가락할 정도였습니다. 1944년 말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큰 쇼크를 받은 히틀러는 반신마비 증상이 생겼고, 계속 정신은 피폐해져갔죠. 여기서부터 ‘히틀러’는 천천히 몰락해갑니다. 그의 주치의 탓인지 모르겠으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동안 마약성분이 짙은 약은 처방받으면서 그의 정신은 더욱 흐릿해지게 되죠. 아무튼 독일군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계속 밀리면서 결국 패배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히틀러’가 프랑스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죠. 과거 예술가의 꿈을 접었던 그에게 프랑스 파리는 무척이나 아끼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파리를 다시 빼앗기고 마느니 불태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파리를 불태우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정 총 사령관 ‘콜티츠’ 중장이 이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히틀러‘는 병적으로 집착을 하면서 그에게 9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히틀러’가 했던 이 말은 후에 너무도 유명해서 영화제목으로 지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후에 재판에서 ‘콜티츠’ 중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파리를 불태워 인류사의 죄인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히틀러의 배신자로 기억되고 말리라.” 그의 올바른 선택이 인류사의 재앙을 막은 것입니다.


이렇듯 히틀러는 말년에 미치광이가 되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죽기 전까지 그가 내린 명령은 부하들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배신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결국 음독자살하였습니다. 이전까지 히틀러의 자살이 권총자살이라고 알려졌으나 최근 소련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음독자살’이라는 점이 더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히틀러’의 세계 재앙은 이렇게 극을 내리게 됩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우리는 수도 없이 그를 비방했습니다. 확실히 그가 행했던 악행들은 잘못된 것이었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가치중립적인 태도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습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정책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 없이 잘못되었다는 점 외에 다른 측면에서 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지요. 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피폐해진 독일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재건하고 발전시킨 능력 자체만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히틀러’가 벌였던 일련의 재앙은 허무하게 자기괴멸과 주변인들의 배신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만약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혹은 처음 폴란드 점령에서 끝을 맺었다면, 우리가 아는 그에 대해 아는 모습과는 다른 이상적인 독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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