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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상식 사이

아돌프 히틀러 "나는 잘못 되었지만, 세상은 더욱 잘못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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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70주년’ 아마 이 기념적인 해를 씁쓸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일 겁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사람이 그 해당 인물이 되겠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인류 역사상 아마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요, 10대 아이들이 ‘스탈린’은 생소해도, ‘히틀러’라는 이름은 다들 익히 알고 있을 정도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히틀러’라는 이름을 이렇게도 잘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히틀러’를 기억하는 이유는 늘 따라다니는 명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독재자’, ‘학살자’, ‘악마’, ‘재앙의 원흉’ 등 수많은 부정적인 수식어들이 늘 그의 뒤를 따라 다니죠. 물론 그도 그럴 것이 ‘히틀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돌프 히틀러’가 세계 역사를 바꾼 20인으로 선정되었는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어떠한 악행을 저질렀던 간에,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을 통한 여러 연쇄작용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그간 잘 알지 못했던 그의 개인적인 면모에서 비롯된 여러 사상들 역시 세계 역사를 바꾸는데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모두가 알고 있는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의 개인적인 면을 주제로 다뤄볼까 합니다. 아마도 나치당 집권 후 총통으로써 ‘히틀러’의 모습을 이해하려면, 분명히 충분한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증오했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왔습니다. 특히 영화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히틀러’가 어떻게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죠. 그런데, 문제는 결국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의 단편적인 모습들이 ‘히틀러’와 ‘나치’는 나쁘고 유대인은 불쌍하다는 생각만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위에 조금이라도 반박할만한 점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먼저 ‘히틀러’는 청소년 시절 개인적인 감정으로 유태인을 증오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히틀러’의 모친을 유태인의사가 실수로 죽였다는 설인데, 심지어 그의 모친을 성폭행 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던 대로 그냥 설일 뿐, 사실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이러한 ‘히틀러’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외에 정황상 설명이 되는 여러 설이 있기 때문이지요.


‘히틀러’는 청소년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시 수도의 시장 “카를 루에거”는 심각할 정도로 유태인을 경멸하고 차별하는 사람으로 유명했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보면, 그는 남는 시간을 보통 ‘독서’를 통해 보냈다고 합니다. 이때, 그가 읽었던 책이나 자료들은 대부분 ‘반유대주의’에 대한 과도한 선전물이나, 인종주의적인 정치단체의 자료였습니다.


즉, 당시 분위기가 애초에 ‘반유대주의’였다는 겁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제정러시아 등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활동했던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죠. 동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골목지역에 살면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생활을 연명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과 반유대주의의 선동이 어린 ‘히틀러’에게 분명히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죠.


이러한 감정적인 요소들 외에도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참호와 참호 속을 오가는 ‘연락병’으로 활약합니다. 후에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철십자 훈장을 받기까지 하죠. 후에 이 훈장은 히틀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히틀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 때문에 독일 경제가 붕괴했고, 이를 재건하는데 해를 끼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1919년 독일의 민간은행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고, 증권시장 역시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한 마디로 독일 경제와 언론은 유태인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론은 ‘유태인’을 독일 패전의 원인으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유럽전역에 퍼져있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에게 많은 영향을 준 셈이 된 것입니다. ‘히틀러’는 패전 후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동기들, 충격에 빠져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어떠한 사상적 주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승승장구하며, 위상을 펼치던 독일제국의 허무한 패전과 굴욕적인 조약은 독일 자국민들에게 민족주의적인 분노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를 고취시키는 나치즘을 그들이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기에 그 시기나 분위기가 기회가 되었죠.


결국 기존에 퍼져있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유대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으로 인해 패배했다는 생각을 자국민들에게 심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작용이 잘 통할 것이라는 점을 ‘히틀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가 총통자리에 오르고 또 다시 유럽은 ‘전쟁’이라는 재앙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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