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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상식 사이

'채륜'과 중국의 사대발명(四大發明)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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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4개를 ‘사대발명’이라 지칭합니다. 이 사대발명품들은 중국전역은 물론, 세계 역사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오늘은 그 중 하나인 ‘종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겠지만, ‘종이’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채륜’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채륜’은 중국 후한 중기 사람으로 서기 105년쯤에 ‘종이’를 개발했습니다. 바로 이 당시부터 인류사에 ‘종이’라는 발명품이 전파되었지요. 시기가 엄청나게 오래된 만큼 발명의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 당시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절반도 채 전달되지 않았을 겁니다.





‘종이’의 기원을 살펴보면, 많은 분들이 ‘파피루스’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종이 이전에 분명 기록을 할 만한 어떠한 것들이 존재하긴 했습니다. 허나 ‘파피루스’는 내구성이 좋지 않아 보관하는데 한계가 있었지요. 점토판이나 나무판 같은 것들은 무게도 무겁고, 많은 양의 기록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양피지’가 생기긴 했으나, 단 하나의 종이를 만드는데, 많은 양들을 때려죽여야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즉, 모든 것들이 ‘종이’로써 역할을 하기에는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았죠.

우리가 알고 있는 종이, 근대까지 전해졌던 ‘종이’의 기원은 ‘채륜’이 개발한 “채후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이 최근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2000년 중국에서 “평마탄지”에 대한 논란에 있었습니다. 기존에 이미 “평마탄지”가 발굴되었으나, 이 연구결과가 2000년대에 들어서 나왔기 때문이죠. 논쟁의 쟁점은 이러했습니다. “채후지”와 “평마탄지” 모두 종이라고 인정할만한 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200년 앞선 “평마탄지”가 최초의 종이다. 여기서 종이라고 인정할만한 근거는 바로 ‘식물성 원료’를 통해 가공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양피지’나 ‘파피루스’가 ‘종이’로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였죠. ‘파피루스’는 단순히 식물 잎에 기록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은 한 가지 측면에서 갈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종이’의 목적인데요, ‘기록’이라는 목적에 이 두 ‘종이’가 적합하냐는 문제였습니다. ‘채후지’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복잡한 것이 ‘평마탄지’의 용도가 단순히 청동거울 같은 것들을 싸는 포장지 외에 지도가 그려져 있다는 연구결과가 밝혀지면서 일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죠.




결론은 “채륜”이 발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기존에 전해오던 종이를 개량, 발전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최초의 발명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이는 수정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채륜’의 ‘채후지’가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채륜’의 ‘채후지’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발전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나. 사실 그 당시 후한, 삼국시기 때까지만 해도 대나무에 기록하는 ‘죽간’이 대세였습니다. ‘채후지’가 마침내 빛을 본 것은 당나라 시기였지요.


당나라 시기 ‘종이’가 대중화되었고, 동시에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시기 중앙아시아 쪽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서방측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압바스’라는 왕조와 대립하게 되죠.

 

이 때, 당나라 군 대부분이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힙니다. 잠시 패배의 원인을 말씀드리자면, 수적 열세에다가 당나라 동맹군인 ‘카를룩’ 군이 배신하면서 처참하게 패하였습니다. 그렇게 잡혀간 포로 중에 종이 제작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751년 즉, 중국의 종이 발명에 비하면 서방은 600년이 늦은 시기에나 ‘종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한참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찬란한 문명의 발달은 서구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모든 학문과 문명의 발달이 고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연구가 현재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연구가 완성될 쯤에는 역사가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하겠지요. 물론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었는데요, 저 이야기는 후에 ‘공맹사상’을 다루면서 다뤄보도록 하고 ‘종이’의 전파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그렇게 ‘종이’에 대한 사실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 전까지 이슬람세계에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것들을 비싼 값에 수입해서 쓰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종이’의 발견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획득이었습니다.


그렇게 757년 ‘종이’ 제작 공장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지역이 ‘사마르칸트’라는 곳이었는데, 이때 제작된 종이가 ‘사마르칸트 종이’라고 불러지면서 금세 여기저기 입소문을 타게 되지요. 795년쯤엔 페르시아의 바그다드에서 ‘종이 공장’이 세워졌고, 9세기가 넘어서는 이집트에 ‘종이’가 전파 됩니다. 그 후에 가장 늦게 우리가 찬란한 문명의 시작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던 유럽에 ‘종이’가 전파되지요.


이렇게 ‘종이’가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이 비로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죠. 현재 ‘종이’의 최초 발명에 대해서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점은 ‘채륜’이 개정하고 보완한 ‘채후지’가 분명 세계로 전파된 ‘종이’의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채후지’가 없었다면, 그 기존에 쓰던 단순히 청동거울을 덮는 용의 포장지 역할에 머물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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