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China' 라는 말, 요즘 실감이 나시나요? 중국은 국방력, GDP, 인구 등 단순한 수치만으로도 이미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큼 빠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장력만큼은 기존 어떤 나라보다 월등히 빠르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선 중국이 초일류 국가가 될 가능성도 점점 높아지고 있죠.
중국은 매우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고, 엄청난 숫자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겠죠. 하나의 통일된 민족도 아닌 중국이 어떻게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고 정치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중국인들은 한 인물을 말합니다. ‘당태종 이세민’ 그가 바로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한 인물입니다. 후에 청나라 시절 ‘강희재’와 함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당태종’이 구축한 정치체계를 ‘정관의 치’, ‘정관정요’ 라고 말하는데, 가장 위대한 정치시대라고 할 만큼 안정되고 현명한 정치가 당시에 행해졌습니다.
‘당태종’ 말 그대로 당나라 시대의 태종입니다. ‘태종’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조선시대 ‘이방원’입니다. 어떤 연유인지 제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태종’과 ‘태종’ 둘의 우연찮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이방원’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던 사건 <왕자의 난>을 하나의 공통점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왕자의 난>의 원래 대상은 바로 ‘당태종 이세민’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운 태조 이연의 5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죠. 국가를 창업한 이후, 국가의 기반을 잡는 과정에서 ‘당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을까요?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었을 뿐, 그는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고 후대의 왕들에게 모범이 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행했지요.
당시 시대상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함부로 주어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도둑과 같은 약탈자가 없었고, 아무 곳에서 야숙을 하여도 될 만큼 이상적인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정관 정요> 여기서 정관은 당태종 이세민의 연호를 말하고, 정요란 정치의 요체를 의미합니다.
<정관 정요>에 ‘당태종’의 모습은 간언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현신을 임용하는 군주의 도를 행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언은 아랫사람들의 비판과 제안을 뜻하는데, 사실 이러한 간언은 늘 역사적으로 통치자의 비위를 거슬렀죠. 이를 잘 받아들이고 수용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행실이 바르고 성인군자의 위치에 오른 왕이라도, 1인 체제라는 권력 앞에서 이를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위징’이라는 신하가 그에게 300번이나 간언을 하였어도, ‘당태종’은 이를 반드시 수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징’ 역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았던 것은 자신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고, 백성들을 위해 어떠한 제도를 구축한 점이 아닙니다. 현명한 인재들을 주위에 항상 모아놓고 그 목소리에 귀를 항상 기울였기 때문에 그가 칭송받았던 것이죠.
위에서 언급했던 ‘위징’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위징’은 사실 ‘당태종’이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을 죽이는 계략을 썼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징’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는 점을 ‘당태종’은 알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오히려 정치를 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들 신하들의 간언과 조언을 바탕으로 당나라를 가장 안정된 시기로 이끌어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를 살펴보면, ‘조용조 제도’와 ‘과거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용조 제도’는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세금을 걷었습니다.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1년 중 20일을 나라를 위해 불만 없이 일을 하였으며, 생활도 안정되었죠. 또한, ‘과거제도’는 ‘당태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제도로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현명한 정치제도 속에서 신하들은 마음을 놓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하였고, ‘당태종’은 역정을 내지 않고 언제나 그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태조시절에 비해 2배에 해당하는 영토를 확장하였고, 당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후에 ‘당태종 이세민’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의 군재가 뛰어나고 그가 만든 전술시스템이 천하를 호령할 만 하였으나, 이가 쭉 이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고구려 정벌 당시 수많은 신하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지요. 사실상 정벌에 실패했음은 물론, 자존심에 상처가 생길만큼 큰 패배를 했기 때문에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습니다. 결국 고구려 정벌에 계속해서 전력투구를 하면서, 결국 신하들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당태종 이세민’의 역사를 사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오점들이 존재합니다. 사실 그가 행했던 제도는 대부분 이전의 ‘수나라’에서 구축된 제도였으며, 애초부터 간언을 받아드리고 주변 인재들을 등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그러하죠. 어디까지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예측과 주장에 가깝기는 하나 <정관정요> 역시 승자의 측에서 쓰여진 역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세민’의 역사가 수정되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를 더 이상 명군으로 부를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오기 시작했지요. 사실 아직까지 어떤 점이 진짜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면, 전쟁을 일으켜 주변 국가들을 멸망하게 한 점 등이 당시 아시아 사회에 통용되던 유교적 사상에서 본다면 매우 그릇된 행동이기는 합니다. 허나, 개인적으로 ‘당태종’이 당나라를 조금 더 안정된 시기로 이끌었다는 점과, 하나의 중국으로 통합하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명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행했던 ‘정관의 치’를 후대 모든 국가의 왕들이 교과서처럼 읽었다는 점은 우리가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어야함은 분명한 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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