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콜럼버스’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인물은 어린 아이들까지 알 정도로 유명한 위인에 속해있습니다. 어린이 위인전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단히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 “탐험가, 항해가” “지금의 중남미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
이런 식 으로 알고 있지요. 어쩌다가 이런 식의 평가를 얻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가장 크게 잘못 알려진 지식이 아닌가. 생각되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콜럼버스’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 진실을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콜럼버스’는 1451년경에 태어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탐험을 떠나기 전 동생과 함께 지도를 제작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다의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항해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견해는 1700년 전에 완성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미 그 당시 지구의 둘레까지 계산이 끝난 상태였죠.
또한, 여기서 ‘콜럼버스’가 단순한 탐험정신이 가득한 항해사가 아니었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피해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단순한 탐험이 아닌, 유럽을 부흥시킬 수 있는 어떤 곳을 찾고 있었지요. 후에도 설명하겠지만, 그는 이미 식민주의자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콜럼버스’는 자신의 의견을 토대로 항해를 할 수 있는 기반을 여기저기 요청하게 됩니다.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칼’ 등 여러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달하지요. 많은 거절 끝에 ‘스페인 왕국’의 여왕 ‘이사벨라 1세’가 이를 허락해줍니다.
여기에서 ‘콜럼버스’의 탐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에게 ‘콜럼버스’가 제시한 조항중 하나는 “새로 개척한 식민지에 콜럼버스가 부왕으로 임명되고, 이러한 직책이 자손들에게 계승된다.” 내용이었습니다. 애시 당초 여행 목적이 단순한 탐험이 아니었음을 정확히 들어내었죠. 또한,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 왕국 역시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부를 축적하려면, 다른 곳에서 싼 가격에 물품들을 들여와야 하는데, 이러한 새로운 지역의 활로가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장악으로 막혀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오랜 생각 끝에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1492년 8월 3일 그의 첫 항해가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선원들과 ‘콜럼버스’ 사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 시절 선원들은 ‘콜럼버스’가 말했던 항해술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선원들이 지구가 평평하기 때문에 ‘콜롬버스’의 항해술을 불신했다고 전해지고 있죠. 실제로 위인전에도 그런 식으로 명시가 되어있는 책이 많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콜럼버스’의 항해술에 불만이 많았던 것은 그의 ‘거리 측정법’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지구가 둥글다는 통념은 이미 당시에 뱃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그가 제시했던 ‘거리 측정법’ 대로라면, 인도가 미국의 위치에 있어야합니다. 지구 반 바퀴정도의 큰 오차가 발생했죠.
자 ‘콜럼버스’는 그렇게 서쪽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떠납니다. 첫 도착지는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이었습니다. 이 곳은 말 그대로 별다른 소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단순한 섬이기도 했고, ‘콜럼버스’의 목적, 식민지 건설에 적합하지 않았죠. 그렇게 이어서 지금의 아이티, 쿠바에 해당하는 곳에 도달합니다. 이때, ‘콜럼버스’는 이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아이티인 히스파니올라에다 40여명의 선원들을 남겨 그 곳 원주민들을 식민시켰지요.
여기까지가 그의 1차 항해였습니다. 그 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계약 조건대로 ‘신세계’의 부왕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그의 목적은 매우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듯 했죠.
1493년 말 2차 항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기존과 다르게 1500명이 참가하고 17척이나 되는 배가 동원되었습니다. 1차 항해를 ‘콜럼버스’가 성공적으로 끝마친 여파였지요. 그 당시 식민지를 통해 가지고 왔던 금이나 각종 물품들이 전 유럽에서 열풍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2차 항해는 이곳을 관리하기위한 여정에 불가했습니다.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남겨놨던 40여명은 거의 전멸한 상태였습니다. 선원 대부분은 병으로 죽거나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했죠. 그도 그럴 것이 선원들은 당시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금을 찾기 위해 온갖 행포를 부렸습니다. ‘콜럼버스’는 적극적으로 ‘식민지 행정관’으로써 업무를 시작합니다. 엄청난 수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을 노예화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아이티지역에서 금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당시 기술력으로 캘 수 있을 만한 금의 양은 한계가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3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합니다. 2차 항해 출발 당시에 왕국에 약속했던 금과 물품의 양에 한참 모자랐으니까요.
이 후 3차 항해를 떠납니다만, 역시 기존의 히스파니올라 지역에서 내란이 일어나 ‘식민지 행정관’으로서의 자질부족이 제기되어 소환되고 맙니다. 4차 항해도 매우 보잘 것 없었습니다. 더 나아간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했지만, 이 곳 역시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항해로 심신이 지쳐버리게 되죠.
‘콜롬버스’가 모든 항해를 마칠 즈음 아이티의 원주민 수는 거의 전멸상태였습니다. 기존에 30만 명의 숫자가 500명으로 준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죠. 말 그대로 자신의 부와 지위에 원주민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한 학살자였습니다. 이런 점이 이미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히 막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학생들은 ‘콜럼버스’를 단순한 탐험가, 신대륙을 개척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탐험가의 꿈을 키워준 사람이 ‘콜럼버스’라는 점은 끔찍한 일이죠.
‘콜럼버스’는 자신을 밀어주던 ‘이사벨라’여왕이 퇴위하면서 점점 몰락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그에 대한 역량평가가 매우 저조했었지요. 그런데, 이런 학살자라는 인식은 사실 그 당시 유럽사회에서 먹히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의 머릿속에 애초에 ‘원주민’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관념이 자리잡혀있었습니다. 노예와 학대는 당연하다는 풍조가 전반적으로 깔려있었습니다. 이런 서양 중심적인 사고가 어떻게 하다 잘못 전파되어 지금의 ‘콜럼버스’를 만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겠습니다.
결국 ‘콜럼버스’는 자신의 아들과 주변인들이 보는 앞에서 병으로 처참히 죽게 됩니다. 병명은 ‘매독’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죄 값에 비하면 매우 싼 병이었으나, 당시 ‘매독’은 치명적이었죠.
‘콜럼버스’의 원래 목적은 ‘인도’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처음 영감을 준책이 <동방견문록>이었죠. 후에 동양정치사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만, 그 당시 중국과 더불어 인도라는 지역은 매우 기름지고, 엄청난 양의 값진 물품과 금들이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콜럼버스’가 개척한 곳은 정확히 중남미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인도’라고 착했죠.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인도’를 발견했고, 어느 정도 지위와 부를 누렸다고 착각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고 ‘인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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