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당시, 유럽은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끝날 무렵, 나폴레옹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유럽 국가 대부분이 오랜 전쟁으로 지쳐가면서, 이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하였죠.
그리하여, 결성된 것이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대규모 동맹군이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결점이 하나 있었다면, 아직 모든 국가의 군대들이 합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틈을 놓치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합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이 합류하는 날에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죠.
나폴레옹의 입장에선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그 중에서도 워털루에 진을 치고 있는 영국군을 격파해야만 승산이 있었습니다. 1817년 6월 17일 밤, ‘웰링턴 공작’은 동맹군을 이끌고, 벨기에 북부지방 브뤼셀의 외곽인 워털루에 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병력은 동맹군이 9만, 나폴레옹의 군대가 12만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수적 열세인 동맹군에겐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합류가 절실했죠. 나폴레옹 측에선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만 하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장의 선택이 ‘나폴레옹’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라는 명칭 때문에 흔히들 전투가 ‘워털루’라는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데, 그쪽은 영국군의 본부 위치입니다. 사실 전투가 일어났던 쪽은 ‘워털루’에서 남쪽으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죠.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막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곳인 ‘워털루’를 방어위치로 삼았습니다. 그 밑으로 펼쳐져있는 능선 비탈은 적의 포화와 공격을 방해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죠. 더군다나 당시 영군군의 머스킷 총 부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 위치에서 최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동맹군에게 유리한 요인은 전장만이 아니었습니다. 날씨 또한 큰 영향을 주었죠.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날씨 역시 ‘웰링턴’의 전략에 포함되어있었습니다. 당시 지형성 강우가 쏟아질 것을 미리 알고 ‘워털루’를 거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 전날 밤새 비가 내렸고, 아침이 밝으면서 날씨가 맑아졌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프랑스만의 가공할 전술을 앞세워 진격에 나서게 되죠. 하지만 문제는 땅의 상태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대포의 이동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의 주력이 대포부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치명적이었죠.
만약 전장의 위치가 ‘워털루’가 아닌 50km정도 떨어진 남쪽이었다면, 여타 다른 전투 때처럼 프랑스 군의 포격에 동맹군이 처참히 무너졌을 겁니다. ‘웰링턴’ 공작의 위치선정도 뛰어났지만, 사실 ‘나폴레옹’의 조바심과 침착하지 못한 결단력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프랑스 군은 대포를 위치하게 됩니다. 물론 대포를 끌었던 군인들이 전부 지친 상태로 말이죠.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포를 전진배치 시킵니다. 포를 발사만 할 수 있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허나, 이를 수없이 겪은 동맹군은 또 다른 비책을 준비합니다. 역시 진흙이 뒤덮은 지면이 또 다시 나폴레옹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당시 포탄은 모두 지면에 접촉해야지만 폭발하는 원리였습니다. 진흙의 점성 덕분에 포탄은 지면에 깊숙이 박히게 되었고, 폭발력은 눈에 띌 정도로 감소되었죠.
이에 비해 ‘웰링턴’의 군대는 이를 미리 알고, “불폭탄”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됩니다. 기존의 대포가 곡선형태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에 반해 “불폭탄”은 직사화기형태였습니다. 즉, 능선을 올라오는 프랑스 군에게 직사화기는 치명적이었죠. 간신히 “불폭탄”을 피해 올라온 병사들 역시 아까 말씀 드렸던, 영국군의 머스킷 총 부대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때, 나폴레옹에게 한 가지 악재가 더 겹치게 됩니다. 바로 건강의 악화였습니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복통을 호소하면서 결국 3km 떨어진 본부로 이동하고 맙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전투 지휘권은 ‘네이’라는 사령관에게 넘깁니다. ‘네이’라는 인물은 30세에 장군에 오르고, 35세에 프랑스 군 원수로 임명될 만큼 탁월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감각이 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밑에서 직접적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네이’였습니다.
하지만 ‘네이’의 용맹성과 강인한 체력, 뛰어난 전투력은 한 사건으로 인해서 이미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프랑스가 3년 전에 행했던 ‘러시아 원정’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50만의 정예병이 험난한 원정길에서 단 10%만이 살아남아 돌아왔죠. 너무나도 먼 거리도 문제지만, 살을 에는 추위 역시 원정실패의 요인이었습니다. 아무튼 ‘러시아 원정’은 대실패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네이’ 사령관은 그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무모하고 쉽게 이성을 잃는 사령관으로 전락합니다.
결국 이러한 판단력은 ‘워털루 전투’에서 큰 패배의 요인이 됩니다. ‘웰링턴’의 군대가 잠시 전열을 가다듬는 순간, ‘네이’ 사령관은 이를 적들이 후퇴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를 기회로 생각한 ‘네이’ 사령관은 자신의 기마대는 물론, 나폴레옹 직속 기병대까지 모두 전진 명령을 내립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약간 후진한 동맹군은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어 총공세를 퍼붓지요. ‘네이’가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이때, 막 돌아온 ‘나폴레옹’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나폴레옹’이 다시 기병대를 꾸려 그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이미 궤멸 수준에 이른 후였습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프로이센군이 이미 전장에 다다라 프랑스 군의 좌측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 ‘네이’ 사령관이 ‘영국군’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펼치지만, 결국에 패하고 맙니다. 그 기나긴 20년간의 전쟁이 드디어 끝이 난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화려한 전쟁기록은 결국 그가 신임하고 늘 선봉에서 지휘하던 ‘네이’ 사령관의 오판과 무모함 때문에 막을 내리고 맙니다.
패할 당시 ‘나폴레옹’은 후퇴하거나 항복하지 않고, 황제 의복을 입은 채 자신의 본부에서 동맹군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유배를 가게 되고, 프랑스는 다시 왕정사회로 돌아가게 됩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 퍼뜨렸던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개혁과 진보 정신은 결국 잦은 전쟁과 ‘나폴레옹’의 지나친 야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결국 이러한 왕정사회로의 복귀는 프랑스 사회에서 빈익빈부익부현상을 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이 지금까지도 화자가 되는 비극을 가져오죠.
아마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그렇게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이 기존의 체제를 뒤엎고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 물결을 퍼뜨린 점은 명백하게 그가 위대한 영웅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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